
EBM(근거 중심 의학, Evidence-Based Medicine)은 현대 의학과 수의학의 토대가 되는 방법론입니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내용들이나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어떤 진단 검사나 치료를 권할 때는 EBM(수의학(Veterinary medicine)이니까, EB”V”M)을 기반으로 한 얘기를 하죠. 이번 포스팅은 그런 근거 중심 수의학을 기준으로 본다면, 조금 근거 수준이 약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의 만성 통증을 관리할 때 적용해봄직한 케타민 CRI(Constant Rate Infusion, 동일한 속도로 계속 환자에게 약을 주입하는 방법)에 관한 얘길 해볼까 합니다.
먼저 환자 소개를 해보죠. 환자는 15살의 말티즈 믹스로 이런저런 다양한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강아지라 몹시 귀여운데) 아토피도 있고, 2기 정도의 신부전도 있고, 관절염이 심해서 산책을 버거워 하는 노령견입니다.
이전에 제 강아지가 이런저런 치료를 받는다고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관절염으로 인한 만성 통증을 관리하기 위해서 다양한 진통 관리를 하고 있죠.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을 관리하고자 할 때는 여러가지 옵션들을 고려할 수 있는데, 보통 가장 메인으로 쓰는 약은 NSAID나 리브렐라(혹은 솔렌시아) 같은 단클론항체 주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NSAID를 조금 더 선호합니다만, 제 강아지처럼 신부전 때문에 신장 독성이 있는 NSAID의 처방이 부담스러운 환자에서는 리브렐라를 적극적으로 고려해볼 수 있죠.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리브렐라 주사를 맞고 있는 상태입니다.
리브렐라는 좋은 진통 관리 옵션이지만, 모든 통증을 없애주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확실히 주사를 맞기 전에 비해서 활력도 좋아지고, 조금씩 더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만, 그렇다고 관절염 증상이 씻은듯이 사라지지는 않죠. 이건 리브렐라만 그런 건 아니고, 모든 진통제들이 다 그렇습니다. 상당 부분의 통증을 없애주는 big gun(NSAID나 단클론항체)들이 있지만,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통증 관리란 항상 여러 가지 진통제나 방법들을 쌓아가는 방식(이런 방식을 multimodal analgesic이라고 합니다)으로 이루어지죠.
그런 다른 여타의 방법 중 하나로 고려되는 것들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이전에 얘기했던 관절주사도 그런 방법 중 하나가 될테고, 먹는 약으로 처방되는 가바펜틴이나 아만타딘도 부가적인 옵션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통증 관리 방법 중 이 포스팅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건 케타민 CRI입니다. 수의사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꽤나 널리 알려진 통증 관리 방법 중 하나고, 비용도 그리 비싸지 않지만, 병원에 반나절 정도는 입원시켜둬야 된다는 점 때문인지 이상하게 루틴하게 쓰이지는 않는듯 싶더군요. (보통 단클론항체나 NSAID 같은 big gun으로 그럭저럭 관리가 되는 것 같으면 더 세세한 방법까지는 잘 안하게 된다는 것도 이유이지 않나 싶습니다.)
통증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면, 만성 통증을 앓는 환자들의 통증이란 게 늘 일정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통증이 증가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특히 통증을 초반에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조금 더 아플 때까지 기다리면 통증을 관리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죠. 통증이란 원래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경고 신호합니다. 바늘에 찔렸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을 뗄 수 있는 건 통증이 손을 떼라고 경고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만성 통증에서는 이런 통증의 순기능이 사라지고 그저 아프기만 한 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몸의 신경계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먼저, 만성 통증 상태가 되면 몸은 통증 신호를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몸에는 통증 신호를 억제하는 브레이크(inhibition)와 가속 페달(amplification)이 있는데, 만성 통증 상태에서는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이 모두 고장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통증을 스스로 누르는 힘이 약해지고, 가속 페달이 고장나면 제멋대로 통증을 더 크고 강하게 느끼게 되죠. 또한 신경 세포 사이에는 통증 신호를 주고받는 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가 왕복 2차선 도로에서 10차선 도로로 확장됩니다(전문 용어로는 시냅스(synapse)에서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와 수용체(receptor)의 양이 모두 증가한다고 합니다). 또한 신경 가소성이라는 현상 때문에 척수와 뇌의 구조 자체가 변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서로 상관없던 신경들이 통증 때문에 서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비상깜빡이를 켰는데, 와이퍼가 움직이는 것 같은 상태가 되고, 뇌 회로에 혼선이 생겨서 통증 신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부풀리게 됩니다.
그래서 만성 통증을 관리한다는 건 단순히 있는 통증을 없애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런 통증 신호를 억제하는 능력을 잃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통증이 증폭되는 걸 막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약이 케타민인거죠. 케타민은 NMDA antagonist라고 해서 기본적으로 뇌와 척수에 작용하는 약입니다. 신경의 활성을 줄이는 역할을 해서 앞서 언급했던 만성 통증에서 안 좋은 변화들을 막아주는 일을 합니다.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이다 보니 인지 능력이나 기분에도 영향을 줘서, 사람에서는 케타민이 우울증이나 불안증상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도 있죠.
사람에서도 에비던스가 탄탄하냐 하면, 꽤나 여러가지 논문들이 나왔지만, 아직 빵빵한 에비던스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가이드라인에서도 이 얘기를 하죠). 하지만 동물에서 케타민 CRI는 이미 급성 통증 관리(보통 수술 후 통증)에 사용하고 있는 약이고, CRI를 할 때 쓰는 정도의 용량에서는 별 부작용이 없다는 게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설사 부작용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CRI를 멈추거나, 용량을 줄이면 해소되고요.
사람에서는 케타민 CRI를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CRPS, 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이나 암성 통증(cancer pain),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같은 질환에서 적용합니다. 동물의 경우는 우울증이나 PTSD 같은 질환이 명확히 평가되기 어렵기 때문에 보통은 만성 통증에서 케타민 CRI를 고려합니다. 저희 집 강아지처럼 관절염에서도 적용해볼 수 있고, 디스크(IVDD) 질환이나 말기 종양 환자의 암성 통증을 관리할 때 써볼 수 있죠.
다시 케이스로 돌아가서 그럼 저희집 강아지는 왜 케타민을 통증 관리 수단으로 썼을까요? 먼저 신부전이 있다는 점이 컸습니다. 케타민 CRI의 에비던스가 탄탄하지는 않지만, 신부전 환자에서 간헐적인 수액 치료는 수화 상태를 일시적으로나마 개선하는데 효과가 있습니다. 케타민도 주고, 수액도 주고 겸사겸사였던 거죠. 또한 대부분의 관절염 환자들이 그렇듯 나이가 들면서 올 수 있는 인지장애(=치매)의 두려움을 케타민이 어느정도는 완화시켜주지 않을까…라는 지푸라기를 잡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인지장애가 뚜렷하게 의심되는 강아지는 아니지만요). 실제로 케타민 치료를 받고 집에 간 날은 수액 때문에 반짝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평소보다 기분도 더 좋아보이고, 움직임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평소에는 엄청 느릿하게 걷거나 산책을 안하겠다고 주저앉는 경우가 많은데, 관절염 통증 관리를 적극적으로 한 이후로는 그래도 조금씩 더 적극적으로 걷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케타민 CRI처럼 에빈던스 수준이 높지 않은 치료는 비용이 저렴해야하고, 수월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해진 방법이 없다보니, 어느 정도 간격으로 얼마나 오랜 기간 케타민을 줄 것이냐는 치료를 하는 수의사마다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만, 오늘동물병원의 경우엔 한 번 케타민 CRI를 할 때는 최소 4시간 이상, 첫 3번 동안은 2주 간격으로, 4번째부터는 6주 간격으로 CRI를 합니다(저도 어딘가의 통증 관리 전문가가 하는 걸 보고 따라하기로). (일하는데 신경쓰여서 강아지 고양이 데리고 출근하는 걸 기피하는 저같은 수의사도 해봄직한 간격이죠). 병원에서 공짜(?) 치료를 하는 동물병원 원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케타민은 비싼 약이 아니니 치료가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고요.
정맥 라인을 잡는 게 어렵지만 않다면, 수월함 면에서도 힘들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예컨대 관절주사 같은 경우는 주사 통증이 있어서 진정 후에 관절 주사를 하는 걸 추천하지만, 케타민 CRI는 정맥 라인만 잡으면 진정을 해야하는 건 아니죠. 물론 환자 중에는 정맥 라인을 잡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아픈 적이 많아서 병원에 자주 입원했던 환자들이 특히 그렇죠. 이런 환자들의 경우에는 피하주사로 케타민을 주기도 합니다. 정맥으로 주는 CRI가 그렇듯, 일정한 용량이 꾸준히 계속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특별한 피하 주사 펌프(subcutaneous pump)를 씁니다. (이러면 비용은 비싸지지만, 어째든 정맥 라인을 잡기 어려우니 대안으로 고려해볼 수 있죠).
보통 케타민 CRI를 하는 환자들은 기존의 조금 더 에비던스가 탄탄한 통증 관리 수단을 쓰는데, 그것만으로 통증 관리가 잘 안되거나, 추가적인 통증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이 치료를 하게 됩니다. 저희집 강아지 같은 경우는 리브렐라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되어 케타민 CRI를 한 거고요. 에비던스 레벨로 보자면 지푸라기지만, 여러 다양한 수의사들의 (효과 좋더라는) 경험담이 있는 치료(있어보이게 얘기하면 사례 증거(anecdotal evidence)가 있다고 합니다)고, 큰 부담없이 잡아볼 수 있는 지푸라기랄까요. 저희집 강아지를 보면 그래도 나름 튼튼한 지푸라기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