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에는 그렇지 않은데, 병원만 오면 호랑이로 변신하는 고양이들이나, 병원만 오면 만지기만 해도 사람을 물려고 하는 강아지들이 있습니다. 이런 환자들에게 병원에서 내원 전 먹이고 오시라고 말씀드리는 약들이 있습니다. 병원에 따라, 수의사에 따라 약에 대한 설명이 조금씩 달라지곤 하지만, 정확하게는 항불안제라고 할 수 있죠. 가바펜틴이나 트라조돈 같은 약들입니다. 이런 약에 대한 질문이 안부 게시판에 올라와서 간단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먼저, 용어를 조금 명확하게 정리하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예민한 환자에게 스트레스를 덜 받고, 검사가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처방하는 약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통칭해서 다 같은 진정제라고 얘기하지만, 의학적으로는 그 밑에서도 세분화해서 구분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항불안제(Anxiolytic)에 해당하는 약이 있습니다. 가바펜틴이나 트라조돈 같은 약으로 이런 약들은 진정을 한다기보다는 환자의 불안감을 줄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두번째는 진정제(Sedative)입니다. 말그대로 환자를 진정시켜 버리는 약입니다. 메데토미딘이나 아세프로마진, 미다졸람, 혹은 부토파놀 같은 오피오이드 계통의 약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약들은 환자를 진정시켜서 자극에 대한 반응을 줄여버립니다. 어느 정도의 용량을 쓰느냐에 따라 단순히 항불안제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고용량을 쓰면 환자가 거의 움직이지 않죠. 마지막은 마취제(Anesthetic)입니다. 고용량을 쓰면 수술이 가능한 수준까지 환자를 마취할 수 있는 약들이지만, 저용량으로 쓸 때는 진정 효과를 노릴 수 있습니다.
용량을 어느 정도로 쓰느냐에 따라 작용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보자면, 항불안제, 진정제, 마취제 순서로 약이 세다 아니다를 구분해볼 수 있겠네요. (항불안제가 가장 약한 약입니다)
이쯤에서 잠깐 동물병원의 역사(?)에 대한 얘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보통 완전한 진정을 목표로 하고 약을 썼기 때문에 내원 전에 약을 먹이고 오시라는 얘길 드리기보다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주사를 이용해서 진정을 했습니다. 가장 많이 쓰는 약으로는 메데토미딘이나 자일라진, 아세프로마진 같은 약들이 있고, 조금 약을 세게 쓰면 케타민 같은 마취제를 쓰기도 했죠. 거의 마취라고 볼 수준의 진정이 많았고, 잔뜩 긴장한 환자를 재우기 위해서는 용량도 세게 써야 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사고가 나는 일도 많았습니다. 이 때의 기억 때문에 현재도 아이를 진정한다고 하면 겁을 먹는 보호자분들이 많으십니다. 진정하다가 약의 부작용 때문에 아이가 잘못될까봐요.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보호자분들께서 진정을 꺼리시다보니, 동물병원 중에서는 아이를 진정하지 않고 진료를 본다는 걸 장점으로 홍보하는 병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사나워도 힘으로 누르고 진료를 보는거죠. 아마 대형견이 거의 없는 한국의 임상 환경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대형견은 사람이 힘으로 누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을 하는 병원은 실력이 없는 병원, 진정을 안하는 병원은 실력이 좋은 병원 같은 선입견이 생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