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퍼블리싱 된 논문으로 동물병원에서 “한가하네”라는 얘기를 했을 때, 정말 업무 로딩이 증가하는가에 대한 걸 확인해본 논문이죠. 이것도 (수의학에서는 보기 드문) RCT 논문입니다. 실험 방식은 비슷합니다. 대조군에서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실험군에서는 “한가한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어떤 인사를 건네느냐에 따라서 업무 로딩(환자 내원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결론은 “유명한 미신과 달리, ‘한가하다’는 말이 환자를 더 많이 오게하진 않는다”는 얘길 하죠.
오늘동물병원은 늘 EBM(Evidence-based medicine, 근거 중심 의학)을 신봉하는 병원이기 때문에, 에비던스 하이라키의 상단에 위치한 RCT 논문이라면 늘 따라가려고 노력하죠. 입 밖에 내기 두려운 단어라 하더라도, 혹은 내가 경험해보니 에비던스랑 완전히 반대되는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점심 먹고 병원 돌아오는 길에 한가하다고 한마디 뱉었다가 그 날 CPR 해본 수의사), 에비던스가 그렇다고 하면 내 경험이 블랙 스완(=통계적 극단값)이겠거니…라고 생각합니다. 에비던스와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보편으로서의 가이드라인과 수의학을 만든다고 생각하죠.
EBM(근거 중심 의학)을 따른다는 건 그런 겁니다. 실제로 내가 경험한 소수의 n수가 아니라, 올바르게 설계된 실험에서 개인이 경험하기 어려운 n수를 (논문으로)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자신의 경험을 참고는 하되 무시하고) 보편을 따르는 거죠. 일전에 어떤 보호자분이 저에게 어떤 질환에 대한 “원장님의 노하우”가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사실은 그런 ‘노하우’가 있는 수의사가 그리 좋은 수의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의학이 그렇듯, 수의학은 A라는 수의사에게 진료를 볼 때나, B라는 수의사에게 진료를 볼 때나, 환자가 동일한 진료를 볼 수 있게 하는 걸 목표로 하는 학문입니다. 가이드라인과 근거 중심 의학이 있는 건 그래서고요. 현대의 수의학은 탁월한 한 명의 수의사를 길러내는 걸 목표로 하지 않고, 일정 수준 이상인 다수의 수의사를 길러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오늘도 마음 한켠 일말의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병원 왜이렇게 한가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