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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감명깊게 읽은 논문. "한가하다"는 말은 금기일까?

이건 어떤 곳이든 다 똑같을 것 같지만, 병원에서는 특히나 의료진들 사이에서 “한가하다”는 말이 금기와 같습니다. 누군가 “오늘 좀 한가하네”라는 말을 입 밖에 낸 순간 갑자기 응급 환자들이 몰려오고, 병원이 바빠지기 시작하죠. 인턴들이 입 밖으로 “한가하다”는 말을 뱉으면 윗년차 선생님들께 구박을 받고,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되죠. 일이 바쁘고 힘든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건 동물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미신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게 되는 미신이죠.

수의학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얘기지만, (당장 블로그에 쓸 소재가 없으니 재미삼아) 이게 정말 맞는 말인지 한 번 팩트 체크를 해보죠. 이런 것까지도 논문이 있다는 부분이 아주 재밌고 감명깊었는데, 병원에서 “한가하다”는 금기어를 입 밖에 내면, 정말 병원이 바빠지는지… 갑자기 응급 환자들이 밀려오는지를 확인해본 논문이 있습니다. 2022년 미국 응급의학 저널(The American Journal of Emergency Medicine)에 올라온 논문입니다.

사람 병원 응급실에서 “오늘 한가하네(Quiet)”라고 했을 때, 정말 병원이 바빠지는지를 확인해본 RCT(Randomized controlled trial, 무작위 배정 임상시험) 논문입니다. 에비던스 중에서 높게 치는 게 RCT 논문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RCT 논문입니다. RCT 논문답게 무작위로 응급실에서 (뱉어서는 안되는) “오늘 한가한가봐?”라는 말을 뱉은 실험군과, 똑같은 하루 인사를 “한가하다”라는 말을 제외하고 한 대조군으로 나눠서 실험을 했죠. 그리고 대략 3시간 후에 의료진에게 오늘이 어땠는가에 대한 설문을 해서 실제 “한가하다”는 말이 그 날의 업무 로딩을 다르게 만들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결과는 아주(?) 놀라운데, 실제로 “한가하다”는 말을 들은 실험군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 사이에 환자의 로딩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가한다는 얘길 누군가 입 밖으로 뱉었든, 뱉지 않았든… 병원의 응급 환자 내원수와 의료진의 업무로딩은 별차이 없었다는 얘기죠.

수의학이 늘(?) 그렇듯, 인의에서 이런 얘기가 있었다면, 외삽을 할 때가 많습니다만… 이건 몹시 중요한(?) 연구이기 때문에 외삽에서 그치지 않고, 수의 영역에서도 정말 그런지에 대한 연구가 있었습니다(…는 사실 수의 쪽이 시기상으로는 퍼블리싱이 빠릅니다. 수의사들은 노는 걸 좋아하는 멋진 사람들)

2019년 퍼블리싱 된 논문으로 동물병원에서 “한가하네”라는 얘기를 했을 때, 정말 업무 로딩이 증가하는가에 대한 걸 확인해본 논문이죠. 이것도 (수의학에서는 보기 드문) RCT 논문입니다. 실험 방식은 비슷합니다. 대조군에서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실험군에서는 “한가한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어떤 인사를 건네느냐에 따라서 업무 로딩(환자 내원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결론은 “유명한 미신과 달리, ‘한가하다’는 말이 환자를 더 많이 오게하진 않는다”는 얘길 하죠.

오늘동물병원은 늘 EBM(Evidence-based medicine, 근거 중심 의학)을 신봉하는 병원이기 때문에, 에비던스 하이라키의 상단에 위치한 RCT 논문이라면 늘 따라가려고 노력하죠. 입 밖에 내기 두려운 단어라 하더라도, 혹은 내가 경험해보니 에비던스랑 완전히 반대되는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점심 먹고 병원 돌아오는 길에 한가하다고 한마디 뱉었다가 그 날 CPR 해본 수의사), 에비던스가 그렇다고 하면 내 경험이 블랙 스완(=통계적 극단값)이겠거니…라고 생각합니다. 에비던스와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보편으로서의 가이드라인과 수의학을 만든다고 생각하죠.

EBM(근거 중심 의학)을 따른다는 건 그런 겁니다. 실제로 내가 경험한 소수의 n수가 아니라, 올바르게 설계된 실험에서 개인이 경험하기 어려운 n수를 (논문으로)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자신의 경험을 참고는 하되 무시하고) 보편을 따르는 거죠. 일전에 어떤 보호자분이 저에게 어떤 질환에 대한 “원장님의 노하우”가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사실은 그런 ‘노하우’가 있는 수의사가 그리 좋은 수의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의학이 그렇듯, 수의학은 A라는 수의사에게 진료를 볼 때나, B라는 수의사에게 진료를 볼 때나, 환자가 동일한 진료를 볼 수 있게 하는 걸 목표로 하는 학문입니다. 가이드라인과 근거 중심 의학이 있는 건 그래서고요. 현대의 수의학은 탁월한 한 명의 수의사를 길러내는 걸 목표로 하지 않고, 일정 수준 이상인 다수의 수의사를 길러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오늘도 마음 한켠 일말의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병원 왜이렇게 한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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