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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 리가슈어 수술 장비에 관한 이야기

요즘에 리가슈어 같은 혈관 실링 디바이스(vessel sealing device)를 사용하지 않는 병원은 많지 않습니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수술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더 적은 통증을 동반하면서 수술을 더 안전하고 빠르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수술 도구라서 예전처럼 봉합사로 하나하나 혈관을 결찰하는 걸 최근에는 잘 하지 않죠. 오늘동물병원도 코비디엔(Covidien)사의 FT10이라는 장비를 사용합니다. 최근에 블로그 댓글로 어떤 분이 이 장비와 관련해서 이 장비의 핸들(사진 속 가위처럼 생긴 장비, 리가슈어라고 합니다) 재사용에 관한 걸 물어보셔서 포스팅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나름의 재미가 있겠다 싶어 (이실직고하는 마음을 담아) 글을 써봅니다.

먼저 알고 가야하는 건, 저 리가슈어 핸들이 일회용 소모품이라는 점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Single Use”(=일회용)라고 적혀 있고, “Do not resterilize”(재멸균 금지)라고 포장지에 적혀있죠. 제조사인 코비디엔에서는 이 핸들을 재사용하는 걸 권고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이상적인 세상에서라면 이 핸들은 다른 대부분의 의료 소모품들이 그렇듯, 포장지를 벗기고 사용하면 폐기해야만 하죠. 하지만 사람 병원이라면 모를까, 일선 동물병원에서 이 핸들을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이유는 이 리가슈어 핸들의 가격에 있습니다. 굳이 비밀도 아니니,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이 리가슈어 핸들의 가격을 한 번 알아보죠.

리가슈어 핸들은 종류가 꽤 다양한데, 강아지 고양이 임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제품은 LF2019라는 핸들입니다. (LF1212라는 구형 제품도 있는데, 가격은 얼추 비슷하죠) 가격은 개당 대략 66만원 정도합니다.

돈 얘길 하고 싶진 않지만, 단순 산수 계산을 했을 때, 저 핸들을 권고대로 일회용으로 쓴다면, 수술비에 최소 66만원이 얹혀져야한다는 얘기가 됩니다(실제로 저 핸들을 물려쓰는 장비 가격까지 감안하면 그보다 큰 비용이 얹혀지겠죠). 동물병원은 자선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고, 소모품 비용은 당연히 수술비에 포함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지역에 따라, 병원에 따라 비용은 조금씩 다르겠습니다만, 흔히 암컷 중성화 수술 비용이 40-50만원 정도인데, 제조사의 권고대로 중성화 수술에 리가슈어를 일회용으로 쓴다면, 일단 암컷 중성화 비용은 미니멈 100만원에서 시작하게 되겠군요.

보호자가 이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면, 병원에서도 찝찝하게 제조사가 일회용으로 쓰라는 장비를 재사용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용 차이가 많이 나게 되면, 수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동물병원은 굳이 얘기하자면, 강아지 고양이에게 최선이라 생각되는 비싼 소모품들을 맘껏 사용하고, 보호자분의 지갑 사정을 애써 무시하려는 병원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만, 어디든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리가슈어는 그 선을 한참 넘어가 있죠. 수의학에서 이렇게 비용을 따졌을 때,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리가슈어는 그런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리가슈어 핸들의 사용과 관련된 얘기는 일회용으로 쓰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몇 회까지 재사용을 할 것이냐…로 귀결이 됩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현실이 발목을 잡으니, 이상을 쫓되 현실에 발붙일 수 밖에 없는 거죠. 제조사에서 일회용으로 쓰라는 제품이니, 세척이 용이하게 디자인되지도 않았고, 어떻게 소독을 하는 것이 좋은지, 몇 회까지 재사용할 것인지에 관한 데이터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몇 회까지 재사용을 할 것이냐는, 어떤 수술에 주로 활용하는지, 혹은 원장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짠내가 나는지에 따라 병원마다 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상과 거리가 먼 열악한 수의학 환경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 짠내나는 학문이라는 건 전세계 수의사 모두가 알지만, 이 정도 마지노선은 지키자는 대략적인 가이드가 있기는 합니다. 2018년 Veterinary Surgery에 올라온 리가슈어 재사용에 관한 논문에 그런 얘기가 있죠.

논문에서는 리가슈어를 반복 사용했을 때, 혈관을 결찰해주는 성능이 떨어지는지를 확인해봤습니다. 리가슈어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수술 중 하나인 비장전적출 수술을 모사한 걸 1회 사용이라고 간주하고, 몇 번이나 써야 성능에 문제가 생기는지(=폐기해야하는지)에 대한 걸 확인해본 논문이죠. 결론만 보자면 끝의 실링 부분(jaw)이 긴 제품과 아닌 제품 사이의 차이는 있지만, 흔히 쓰는 Small Jaw 제품의 경우, 대략 10회 정도를 사용하면 혈관 결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길 합니다.

실제 리가슈어를 수술에서 사용해본 수의사들이라면 알겠지만, 리가슈어는 칼날이 무뎌졌다고 생각될 때, 혹은 혈관 실링이 잘 안된다고 생각할 때 폐기하는 게 일반적입니다만, 논문을 보면 small jaw 제품의 경우, 칼날이 무뎌지기 시작하면 곧이어 혈관 실링이 잘 안되기 시작한다는 얘길 하죠. 논문의 저자가 얼마나 악착같은(?) 사람이냐면, 이렇게 리가슈어를 재사용하다가 칼날이 무뎌지거나 해서, 폐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리가슈어로 결찰해놓은 혈관을 조직 검사해서 실링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까지 했습니다.

그림을 보면, 처음 사용할 때는 A 그림처럼 혈관이 이쁘게 잘 실링되지만, 반복 사용을 해서 실링 기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B 그림처럼 결찰됐다고 생각한 혈관에 미세한 틈(화살표)이 생기게 되죠. 이런 것들은 실제 수술에서 확인이 어려울 수 있는데, 마취로 인해 혈압이 떨어지면, 혈관 내의 압력이 낮게 유지되니까 실링이 잘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링이 잘 됐다고 생각한 부분이 마취가 깨면서 혈압이 올라가면, 미세한 틈을 타고 출혈이 생길 수 있는 거죠. 논문에서는 실제로 리가슈어가 실링을 제대로 하는데 실패한 총 11번의 케이스에서 3번을 수술 중에 확인하지 못했다고 얘기합니다.

제대로 혈관을 실링해주느냐를 떠나서, 반복 사용을 하고자 한다면, 오염물이 기구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부분도 고려를 해야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짠내나는 수의사들에겐 논문이 있습니다. 2019년 Veterinary Surgery에 올라온 논문입니다.

Maryland jaw라고, 흔히 쓰는 small jaw가 아닌 복강경 수술을 할 때 쓰는 리가슈어이긴 합니다만, 중성화 수술을 모사해서 진행했을 때, 오염물이 얼마나 많이 남는지, 몇 번까지 재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본 논문이죠. 이 논문에서는 깨끗하게 잘 세척하고, 플라즈마 소독기(Hydrogen peroxide sterilization)를 사용하면, 세균 오염의 문제에서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더라…라는 얘길 하죠. (물론 반복된 세척과 소독이 리가슈어 핸들의 버튼을 고장내서 무한정 반복사용은 어렵더라…는 얘기도 합니다.)

이런 논문들을 보면, 짠내가 좀 나는 건 현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만, 짠내가 좀 나더라도 하나의 리가슈어 핸들을 10회 이상 반복 사용하는 건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널널하게 보자면, 제일 빨리 망가진 게 10회였고, 조금 늦게 망가지는 것들까지 포함하면 평균 17회 정도까지 쓸 수 있다고 하니, 어떤 수술을 병원에서 제일 많이 하느냐에 따라서 대충 그 중간쯤의 어딘가를 기준으로 잡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많이 쓰면 쓸수록 장비가 제기능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10회 사용을 기준으로 본다면 1번 사용할 때 비용이 66,000원이니 이것도 저렴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럭저럭 이 정도 선까지만 비용이 내려와도 보호자분께 더 좋은 수술을 비교적 나쁘지 않은 비용으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할 수 있죠. (앞서 소개했듯 이 정도 선까지는 괜찮더라는 짠내 논문들이 있기도 하고요.)


부끄러운 얘기일 수 있지만, 오늘동물병원의 경우도 이런 어른의 사정 때문에 리가슈어 핸들은 재사용을 합니다. 한 번 쓸 때마다 핸들에 표시를 해놓고, 10회를 넘어가면 폐기 후 새로운 핸들을 개봉하죠. 이상적이냐 하면 당연히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모든 동물병원이 강아지 고양이의 수술에 새 리가슈어 핸들을 사용하고, 보호자분들이 중성화 수술에 100만원 이상 척척 비용을 지불합니다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발디디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에 너무 발을 오래 디디고 있었더니, 짠내가 몸에서 가시지 않는 것 같다는 슬픔은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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