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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약, 크레메진

크레메진, 레나메진, 코발진 같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부 AST-120이라고 하는 성분을 주성분으로 하는 신부전 약물의 상품명입니다. 사람용으로 일본에서 개발된 크레메진과 동물용 코발진, 한국에서 만들어진 레나메진, 이름은 모두 다르지만 전부 같은 약입니다. 신부전의 진행을 늦춰주거나, 크레아티닌 수치를 떨어뜨려준다는 이유로 처방되는 약입니다. 꽤나 전문적인 내용이 될듯 싶지만,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에 대한 얘길 써볼까 합니다. 신부전 환자를 관리하는 보호자분들께서 크레메진 처방에 관해 물어보시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오늘동물병원은 신부전 환자에서 크레메진을 처방하지 않는데, 왜 처방하지 않는지, 관련 근거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적어보려 합니다.

먼저 AST-120에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약을 쓰는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AST-120은 일종의 활성 흡착탄(사진 속 숯가루 같은 것)입니다. AST-120은 100-300 Da 사이의 분자량을 갖는 물질을 흡착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요독소(uremic toxin)가 이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다른 흡착탄과는 다르게 소화 효소처럼 분자량이 큰 물질은 흡착하지 않습니다. 장내에서 세균 대사에 의해 생성되는 요독소의 전구체를 흡착해버리는 것이 이 약의 작용 기전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요독소로는 인돌(indole), 크레졸(cresol), 페놀(phenol), 구아나이드 컴파운드(guanide compounds)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흡착된 요독소들은 혈액으로 흡수되지 않고, 변으로 배설되기 때문에 혈액으로 흡수되는 요독소를 줄여줄거라는 이론적 바탕 위에 사용하는 약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동물에서 AST-120이 신부전의 개선에 도움이 되는가에 관한 명확한 에비던스는 없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부전 환자에서 AST-120을 먹여본 논문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2012년 ACVIM(미국수의내과학회) 컨퍼런스에서 발표된 내용(유료링크)을 보면, 고양이에서 AST-120 100mg/kg/day를 먹였을 경우, 요독소인 indoxyl sulfate의 혈중 농도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고, 2012년 ISFM(국제고양이수의학회) 컨퍼런스(유료링크)에서 고양이들이 별 거부감이나 부작용 없이 잘 받아먹는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왜인지 두가지 내용 모두 컨퍼런스에서 소개만 됐을뿐, 이후 논문으로 퍼블리싱되지는 않았습니다)

2019년 고양이 신부전에서 indoxyl sulfate와 p-cresol에 관한 내용이 장내 정상세균총(microbiome)과 관련해 JVIM(수의내과학저널)에 올라온 적이 있지만, 수의학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관리 방법이 알려진 것이 없다는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결국 AST-120을 루틴하게 동물에서 사용하기에는 아직 에비던스가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신부전 치료의 스탠다드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신부전 관리의 스탠다드를 제시하는 IRIS에서는 AST-120을 아직 표준 치료법에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AST-120을 처방하는 수의사들은 근거를 사람 의학에서 찾습니다. 수의학에서 아직 충분한 에비던스가 쌓이지 않은 경우, 사람에서의 내용을 외삽해서 약을 처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AST-120에 관한 사람쪽의 연구는 꽤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사람에서도 AST-120의 에비던스가 빵빵하다고 말하기는 많이 어렵습니다. 에비던스가 탄탄한 약이기보다는 논란의 약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고, 아직 사람에서도 AST-120을 신부전의 표준 관리 방법으로 채택하지는 않습니다.

의학적인 내용에 관해 관련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Uptodate(유료 링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As in a prospective, observational analysis, p-cresyl sulfate and indoxyl sulfate were independently associated with progression of CKD [111], a next logical step was to study the impact of AST-120 on the progression of CKD. In small, controlled studies with a long follow-up period, the group on AST-120 showed a slower decline of estimated glomerular filtration rate (eGFR), was started later on dialysis, and survived longer once dialysis was started [194-196]. However, a large American/European randomized, controlled trial could not confirm the beneficial impact of AST-120 on the progression of kidney failure [197]. The study contained no control of whether the group on AST-120 showed a decrease in plasma concentration of protein-bound uremic toxins. Also, in another study, no impact of AST-120 on progression of CKD could be observed, but, in this study, the administration of the sorbent was not associated with a marked decrease in plasma indoxyl sulfate [198].

Uptodate – Uremic Toxins

간단하게 옮겨보자면, AST-120이 eGFR(추정 사구체여과율)이 줄어드는 걸 느리게 만들어주고, 투석 시기를 늦춰줬으며, 일단 투석이 시작된 이후에도 생존 기간을 늘려줬다는 소규모의 실험 결과가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RCT(무작위 배정 임상시험)에서 AST-120이 신부전의 진행에 어떤 이득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면, 일본에서 AST-120이 꽤 괜찮아보인다는 논문이 나왔는데,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임상 실험에서 아니라는 내용으로 반박이 됐습니다.)

근거 중심의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을 추구하면서 다양한 논문들을 메타 분석해서 관련 에비던스를 확인해보는 코크란도 AST-120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코크란에서는 AST-120 외에 다른 흡착제까지 분석에 포함했는데, 여기서도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만성 신부전 환자에서 적극 추천하기엔 에비던스가 빈약하다” 정도로 결론이 나옵니다.

AST-120은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약이고, 현재 처방약으로 승인이 된 나라도 일본과 한국, 대만 정도뿐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쪽에서는 승인이 되지 않았고, 그렇다보니 관련 논문들도 일본과 한국에서의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실험 설계에 방법론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소규모 일본쪽의 의학 논문이 AST-120의 효과에 관한 긍정적인 리포트를 쓰고 있지만, (효과가 없다는 반박 논문도 꽤 있어서) 아직 그 정도 근거만으로는 스탠다드하게 사용하긴 어렵다 정도가 AST-120에 대한 의학계의 스탠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의학계는 어떤 스탠스라고 할만한 게 생길만한 근거조차도 없습니다.)

효과가 애매한 반면, AST-120은 기본적으로 활성탄이니만큼 다른 약물의 흡수를 저해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고, 다른 활성탄이 그렇듯 부작용으로 변비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AST-120의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만, 신부전 강아지 고양이들이 수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변비에 쉽게 걸린다는 점이나 AST-120 이외에 먹어야 하는 다른 약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를 루틴하게 처방하는 것에는 조금 회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검증되지 않은 효과 대비 가격이 아주 사악합니다. 한국의 경우, 사람에서는 크레메진이 제한적으로 급여 항목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용에 대한 부담이 덜하지만, 동물의 경우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약가가 비싼 편에 속합니다. 신부전 환자의 스탠다드 치료는 AST-120을 제외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신경을 써야 하고, 수의사의 직업적인 윤리에는 “보호자의 (재정)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것도 있습니다. 고가의 약물을 처방할 때는 반드시 그 가격을 합리화할 수 있을 정도로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빵빵한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AST-120이 그런 약이라고 보기는 많이 어렵고요.

이런 근거들을 토대로 오늘동물병원은 AST-120을 처방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좀 더 탄탄한 근거가 생기고, AST-120이 강아지나 고양이 신부전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면 언젠가 처방을 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사람에서의 내용을 외삽한다 하더라도 처방이 합리화되기는 조금 많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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