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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어답터 보호자, 슬로우어답터 수의사

어떤 새로운 기술이 나왔을 때, 그 기술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수용하는 사람들을 얼리어답터라고 합니다. 마케팅 용어인데, 언제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총 다섯가지 그룹으로 구분합니다.

빠르게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얼리어답터가 있는가하면, 완전히 반대되는 지각수용자(laggards)들도 있죠. (제목엔 이해하기 쉽게 슬로우 어답터라고 적었지만, 저런 말은 없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마케팅에 대한 용어로 시작한 이유는 어떤 약을 처방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런 비슷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이 나왔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약을 써서 치료를 하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느 정도 임상 데이터가 좀 더 쌓이고 나서야 약을 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보호자와 수의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약이 나오면 어떻게든 신약을 누구보다 빠르게 구해서 강아지 고양이에게 먹여보시는 분이 있고, 신약이 나온지 한참됐어도 남들 다 쓰고, 별 문제 없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죠. 개인적으로 약에 있어서는 early adopter가 되기보다는 early majority가 되려고 합니다만, 이번 글에서는 이게 어떤 개념인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이런 부분에 있어 대표적인 예시라면, 베라프로스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베라프로스트는 2019년 즈음에 일본에서 새로 나온 신약이라며 고양이 수명을 30세로 늘려줄 거라고 했던 신부전약입니다. 언론에서 주목하면서, 보호자분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죠(지금도 처방하는 병원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서 폐고혈압약으로 쓰는 약인데, 동물 실험 모델에서 신장을 보호하는 효과(renoprotective)가 있다는 얘기가 언급되면서 일본에서 이를 동물용약으로 출시한 것입니다. 엄청난 신약은 아니고 베라프로스트라는 약 자체는 1997년 일본에서 사람의 약물로 개발됐습니다. (포장만 동물약으로 바꾼 거죠) 실제 에비던스가 전혀 없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역시나 일본쪽에서 나온 논문인데, JVIM에 2018년에 베라프로스트가 신부전 고양이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먹일 수 있고, 먹인 그룹의 크레아티닌 수치 상승이 억제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약의 효과는 이렇게 단 한 편의 논문만으로 검증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약이 보편적으로 처방되는 약이 되려면, 좀 더 많은 임상 데이터들이 필요합니다. 안정성과 효능 양쪽 모두에 있어서요. 그래야 어느 정도 용량으로 환자에게 안전하게 먹일 수 있는지, 어떤 효과를 기대해야하는지, 다른 약과의 상호자용은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동물병원은 베라프로스트를 처방하지 않습니다. 신부전에는 베라프로스트보다 더 검증된 다른 치료법들이 있고, 기존의 치료들과 베라프로스트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약들은 미래가 기대되는 약들로 포함시킬 수는 있지만, 당장의 컨센서스에서는 루틴하게 처방하지 않는 약에 가깝습니다. 물론 미래에 이 약이 확실하게 검증되기 전에 먼저 약을 먹여보겠다고 하는 얼리어답터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크게 해만 되지 않는다면, 일단 먹여보겠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물론 그로 인한 책임은 온전히 먹이기로 결정한 사람이 집니다. 그 책임에는 부작용에 대한 가능성도 있고, 별 효과가 없는데 비싼 돈을 주고 약을 구입해서 먹이게 되는 경제적인 부담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약에 있어서 얼리어답터가 되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지만, 마음이 다급한 보호자분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것저것 재고 있는 게 배부른 소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마땅한 치료가 없는 고양이 전염성 복막염(FIP) 같은 경우에는 제 경우도 마음이 다급해져 얼리어답터가 되고, GS-441524라는 신약을 처방하게 되기도 하죠.)

최근 나온 신약 중에는 제다큐어라는 제품도 있습니다. 인지장애(=치매)를 치료해준다고 홍보되고 있고, 크리스데살라진이라는 성분을 가지고 있는 국내 출시 신약입니다. (이 약도 종종 처방하냐는 문의를 받습니다.) 인지장애가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병이고, 진행 속도를 늦추는 정도의 관리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약은 언론의 주목과 보호자분들의 주목을 모두 받습니다. 하지만 신약이다 보니 정말 크리스데살라진이 인지장애를 치료해주는지에 관한 명확한 데이터가 없고, 동물에서의 데이터는 제조사에서 제공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합니다. 서울대학교와 5개의 로컬 동물병원에서 수행한 임상 실험이 있다고 제조사에서 설명하는데,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고, 크리스데살라진에 대해서 수의사가 살펴볼 수 있는 전문적인 내용이 거의 공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약에 대한 에비던스가 전혀 퍼블리싱되지 않은 거죠.

잘 찾아보면, Alzheimer’s Drug Discovery Foundation이라는 곳에서 크리스데살라진에 대해 정리한 내용이 있는데, 사람에서의 효능에 대해 문서지만, 동물에서의 내용이 있어 인용하자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에서의 임상 시험을 한 내용이 있지만, 논문이 아니라 언론 보도로 제조사의 자체 연구 결과를 알린 것이고, 논문으로 나온 것은 쥐에서의 실험 결과를 토대로 한 rodent study입니다. 물론 사람에서도 이 약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신약이기 때문에 얼리어답터라면 시도를 해보는 것 자체는 괜찮을 수 있습니다(수의학에서의 크리스데살라진에 대한 임상 논문은 전무한 수준이라, 안정성에 대한 검증은 제조사를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역시나 약에서 얼리어답터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지장애에 대해서라면 치료제는 아니지만, 진행 속도를 늦추기 위해 나름 널리 처방되는 셀레길린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보호자분은 마음이 다급하고, 수의사는 불필요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괜히 신약에 비싼 약값을 지불하느라 정작 검증된 치료나 진단 검사를 진행하게 되지 못하게 될까 걱정도 되고요.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는 사람들을 마케팅 업계나 기술 업계에서는 얼리어답터라고 합니다만, 의료계에서는 다른 표현을 씁니다. 조금 무섭지만, 임상 시험이라는 표현을 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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