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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약과 파란약? 노란 카테터와 파란 카테터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모피어스가 주인공 네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빨간약과 매트릭스에 그대로 남을 수 있는 파란약 중에 선택을 강요하는 장면이 나오죠. 고민 끝에 빨간약을 집은 주인공은 그동안 겪어온 자신의 삶이 사실은 허구였고, 실제 현실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저는 늘 기회만 있다면 파란약을 뭉텅이로 집어먹고 안온한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사람인데, 최근 반강제로 빨간약을 집어먹게 된 일이 있어 포스팅을 써볼까 합니다. 보호자분들에게 별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고, 블로그를 간혹 찾아주시는 수의사나 테크니션 선생님들이 재밌어할만한 내용입니다.

5-6kg 정도의 소형견이나 고양이가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있다고 해보죠. 수액을 맞거나 정맥 주사 처치를 받아야 하니 대부분의 입원 환자들은 정맥 라인(Intravenous catheter)을 장착하게 됩니다. 수의사 선생님들은 이 때 어떤 색의 정맥(IV) 카테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제 경우에는 노란색 카테터를 선택합니다. 인턴 때부터 노란색 카테터를 기본 사이즈로 임상을 배웠고, 지난 시간 동안 노란색 카테터를 의심해본 일은 딱히 없었습니다. IV 라인을 잡고 테이핑을 어떻게 할거냐를 고민해본 적은 있었지만, 카테터 사이즈에 관해서는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소셜 미디어 스레드에서 남들은 어떤가 싶어, 동물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다들 노란색 카테터를 제일 많이 쓰더군요.

응급쪽에서는 카테터 사이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긴 합니다. 특히 쇼크 상태에서 단시간에 환자에게 수액을 주기 위해서는 카테터의 직경이 큰(=게이지가 숫자가 작은) 걸 써야 한다는 걸 공부한 적이 있죠. 하지만 대다수 소형견이나 고양이를 진료하는 한국의 임상 환경에서는 카테터 직경이 작다고 수액을 못 밀어넣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어쩐지 바늘 크기가 작아서 조금 덜 아플 것 같고, 라인 잡기에도 더 편한 느낌이 드는 노란색 카테터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스레드에서는 심지어 더 가느다란 보라색 카테터(26G)를 주로 쓴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혹시 헷갈릴 수 있으니 색 공부를 한 번 하고 가죠. IV 카테터들의 직경과 색상 코드는 대충 이런 약속을 두고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보통은 24게이지 노란색 카테터를 쓰되, 조금 더 가느다란 걸 선호하는 경우에는 26게이지 보라색을 쓰는거죠. 20kg을 넘는 대형견 정도가 되면 그때서야 파란색 22게이지를 쓰는 게 일반적인 경향 아닌가 싶습니다.

카테터 사이즈가 중요해지는 건 수액을 환자에게 단시간에 밀어넣을 때(=쇼크에서 볼루스 줄 때)입니다. 그래서 응급 쪽에서는 “Go big or go home”이라는 얘길 하죠. 굵은 걸 잡을 게 아니면 애초에 라인 잡지 말라는 뉘앙스랄까요. 강아지를 예로 들어보면, 보통 쇼크일 때 밀어넣어야 하는 수액의 양을 90ml x 체중(kg)이라고 봅니다. 10kg 정도 강아지라면 900mL(90 x 10)의 수액에서 약 1/4 정도(대충 225mL)을 15분 사이에 환자의 정맥으로 밀어넣죠. 대략 1분당 15mL 정도의 수액이 카테터를 통해 환자에게 들어가야한다는 얘기입니다. 노란색 24게이지로 밀어넣을 수 있는 속도가 최대 20mL/min이니까 10kg짜리 환자라면 노란색을 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죠.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13kg를 넘는 강아지에서는 노란색을 써서는 쇼크 상태에서 충분한 수액을 줄 수 없습니다. (13kg 넘어가면 일단 미니멈 파란색을 집어야 한다는 얘기.)

고양이의 경우는 쇼크 상태에서 주는 수액의 양이 더 적고, 체중도 조금 커봤자 8-9kg이니, 똑같이 계산하더라도 사실 노란색이면 부족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카테터 사이즈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지 않았죠. 모두가 노란색을 쓰는 세상에서 굳이 혼자서 파란색을 집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는 매트릭스에서 스테이크 먹겠다고 네오를 배신한 대머리 같은 사람…)

그렇게 노란색 카테터(=파란약)을 계속 집다가 빨간약을 집게 된 건 얼마 전 본 논문 때문입니다. 올해(24년) 초에 JAVMA에 올라온 논문으로 고양이에서 크기가 작은 카테터를 썼더니 라인 잡아놨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더 많더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논문이죠.

처음 논문 제목을 보고는, 작은 게이지라는 게 얼마나 작은 걸 얘기하는 거야…라는 단순한 호기심만 있었습니다. 26게이지쯤 얘기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작은 게이지라고 얘기하는 건 22게이지(파란색 카테터)더군요. 제가 평소 쓰는 24게이지 노란색 카테터는 애초에 논의 대상이 아니고, 22게이지가 작은 카테터, 이것보다 더 큰 20게이지가 권장되는 카테터 사이즈였습니다.

크기가 작은 카테터를 쓸 수록(그리고 환자의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입원 기간 중에 라인이 막히거나, 꺾이고, 혈관 주변으로 새는 경우가 많더라는 결론이죠. 정맥염(phlebitis)도 라인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크기가 작을수록 빈도가 높을 수 있다는 얘기가 있고요.

처음에는 논문이라서 일부러 좀 큰 거 2개를 가지고 비교했나 싶었습니다. 헌데 생각해보니 인턴 때 라인을 잘 잡고 싶은 생각만 했지, 어떤 사이즈의 카테터가 가장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윗년차가 하니까 따라했을뿐 진지하게 공부해본 적이 없더군요. 그래서 개원 원장이 된 지금에서야 카테터 사이즈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어떤 가이드라인이 있는 건 아니니, 그냥 보편적으로 한국 이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 카테터를 쓰는지 찾아봤죠. 일단 호주에서는 고양이에서 22게이지를 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논문에서 파란색을 디폴트로 두고, 조금 더 큰 핑크색(20게이지)를 비교했던 건 다른 나라에서 파란색이 가장 루틴하게 쓰는 카테터 사이즈였기 때문입니다. 빨간약을 먹은 매트릭스의 대머리는 누가 날 상대로 몰카를 찍는건가 싶은 마음에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서 라인 잡는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두바이에서도 고양이 라인을 파란색으로 잡고, 서인도제도의 수의과대학에서도 성묘는 22게이지를 쓰라고 가르치더군요.

개원한지 4년이 넘어서 라인 잡는 방법을 공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유튜브 라인 잡는 법들을 보니 고양이에서 핑크색(20게이지) 카테터를 밀어넣는다든가, 대형견에서 저는 본 적도 없는 초록색(18게이지) 카테터를 밀어넣고 있더군요. 약간 숨쉬는 법을 새로 공부하게 된 느낌이랄까요.


가느다란 IV 카테터를 쓰는 게 큰 손해가 없는 일이라면, 굳이 두꺼운 바늘을 사용할 이유는 없습니다. 바늘이 두꺼우면 당연히 더 아파할거고, 라인 잡는 것도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하지만 논문에서 얘기하듯이 큰 걸 썼을 때 라인이 덜 막힌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IV 카테터를 쓸만한 이유는 충분합니다. 입원 환자에서 라인이 막히는 횟수가 줄어든다는 얘기는 새로 라인을 잡을 필요가 줄어든다는 얘기와 같고, 그건 의료 비용이나 환자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이 될테니까요. 응급 상황에서 큰 카테터의 중요성을 빼놓고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바꿔야 하는 나름 괜찮은 이유가 있는데, 익숙하다는 이유로(=스테이크를 좋아하는 대머리라는 이유로) 바꾸지 않는 건 악역이나 할 법한 일입니다. 20게이지까지는 아니더라도, 파란색 22게이지를 두고 노란색 24게이지를 고집할 이유는 더더욱 없죠. 원래 매트릭스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빨간약을 먹고 나면,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그런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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