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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전염성 복막염(FIP), 업데이트

과거에는 걸리면 거의 반드시 죽는다고 했던 불치병이 새로운 약의 개발로 치료되는 모습을 보는 건 그 자체로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 수의학의 발전을 옆에서 바로 목격하고 있는 느낌이 들죠. 고양이 전염성 복막염(FIP)에 관한 얘기입니다. 심지어 (1년 예후를 봤을 때) 거의 90%의 고양이가 회복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죠. 이번 포스팅에서는 FIP 치료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과 최근에 업데이트된 내용 등을 얘기해볼까 합니다. (진단과 초기 치료법에 대한 얘기는 케이스 포스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FIP와 관련된 포스팅은 2020년이 마지막이었는데, 지난 2년 사이에 일선의 임상 현실과 치료법에 관한 내용이 꽤 달라진 부분이 있어 그에 대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FIP에 신약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는 FIP 환자를 키우지 않는 보호자분도 고양이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알고 계십니다. GS-441524라는 약이죠. 2019년에 나온 JFMS(고양이 수의학 저널)의 논문 이후로 GS-441524라는 약이 FIP에 걸린 고양이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면서, 지금은 FIP 진단을 받았다하더라도 속절없이 아이를 잃지 않죠. 초기에는 약을 구하기도 어렵고,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가격이 매우 비쌌지만, 최근에는 약값도 많이 저렴해져서, 예전에는 신약이 있는 걸 알아도 치료를 포기하시는 경우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보호자분들께서는 신약이 있다는 얘길 듣고, 치료를 하길 원하시지만, GS-441524라는 약 자체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의약품이 아니고, 블랙마켓을 통해 거래되는 약이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 법적인 문제를 우려해 처방이 안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죠. 허가 받지 않은 약이고 블랙마켓을 통해 구하게 되는 약이기 때문에 약의 신뢰도를 담보할 수 없고, 환자가 치료되지 않았을 때, 이게 약의 신뢰도 문제 때문인지 그냥 환자가 약에 반응하지 않는 케이스인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중국에서 판매되는 라벨도 없는 GS-441524의 약병에 정말 GS-441524가 순도 높게 들어있는지, 아니면 수돗물을 약병에 담아서 보내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죠. 보호자분 입장에서는 치료를 하지 않으면 죽는 병이기 때문에 신약이 절박하지만, 수의사 입장에서 이런 약을 처방한다는 건, 직업 윤리로 봤을 때나 법적으로 봤을 때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보니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수의사들 또한 신약이 있다는 걸 알면서 약을 처방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GS-441524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미국의 제약사인 길리어드사인데, 길리어드사는 동물 시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죠. 하지만 보호자의 절박함은 약의 허가 같은 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국의 약품 제조사도 특허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죠. 이 둘이 만나면서 중국의 약품 회사들은 특허를 무시한채 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전세계의 FIP 고양이 보호자들은 중국에서 만든 약을 구입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간에서 수의사는 사실 할 일이 딱히 없었죠. 진단까지는 내려줄 수 있지만, 약을 처방해서는 안됐으니까요. 그래서 FIP는 정말 특이하게도 진단 이후에는 동물병원을 거치지 않고 치료되는 병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수의사인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동물병원에서 약을 팔아먹어야 하는데, 못 팔아먹는다 같은 경제적인 논리가 아니라 환자에 대한 팔로우업과 예후 평가, 모니터링 검사 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변하게 되는 약의 용량이나, 약효가 있는지에 대한 평가 같은 것들은 병원을 거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게 불가능합니다. 제가 들었던 얘기 중에는 FIP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은 의심 케이스에서, 경험적으로 신약이 별 부작용 없으니 일단 주사해보라는 권고를 (수의사가 아닌) 주변의 다른 보호자분에게 들으셨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또한 약물 자체가 무허가 약물이고, 특허가 길리어드사에 있는 약물이기 때문에, 만약 길리어드가 동물용 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특허권을 행사하면 기존의 약들은 판매가 중단되게 됩니다. 무허가 약물이라는 것은 이런 약물 수급의 불안정성을 필연적으로 갖게 됩니다. 실제로 호주에서는 APVMA(동물용 의약품을 관리하는 호주의 정부 기관)가 문제를 인식하고, 통관되는 과정에서 약물이 수입되는 걸 막았습니다. 그래서 호주에서는 GS-441524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었죠.

물론 이런 모든 문제는 길리어드사에서 정식으로 GS-441524를 허가 받고, 유통하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앞서 언급했듯 길리어드사는 동물용 시장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는 GS-441524와 비슷한 약인 렘데시비르의 허가 때문에 GS-441524의 허가를 받을 생각이 딱히 없는 것에 가깝습니다. 렘데시비르는 사람의 COVID-19 치료제입니다. 당연하겠지만, COVID-19는 FIP 치료제보다 훨씬 더 큰 시장이다보니, 거의 동일한 약이나 마찬가지라고 평가받는 GS-441524를 동물용으로 허가받다가 어떤 부작용이 발견되어버리면 FDA가 렘데시비르를 허가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렘데시비르를 위해 GS-441524를 버린 것에 가깝죠.

최근 이런 답답한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GS-441524가 정식으로 허가 받지 못한 이유는 COVID-19 때문에 렘데시비르를 허가받아야 하는 길리어드사의 전략적인 판단 때문이었지만, 반대로 돌파구를 만들어준 것도 COVID-19였습니다. COVID-19 때문에 GS-441524와 거의 동일한 약이라고 판단되는 렘데시비르가 허가를 받게된 거죠. 보통이라면 허가까지 수년의 시간이 필요한데, COVID-19는 이 과정을 단축시켜서 긴급 허가를 받을 수 있게 해줬습니다. GS-441524의 통관이 막힌 호주의 수의사들은 생각했습니다. 거의 동일한 약이라면 ‘GS-441524 대신 렘데시비르를 FIP 치료에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요. 허가를 받은 약이니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 없이 쓸 수 있습니다. 렘데시비르의 개발명은 GS-5734로 분자 구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약물의 세포 내 침투를 GS-441524보다 조금 더 좋게 만든 약입니다. 고양이에서는 이런 약간의 차이가 실질적으로 세포 내 침투를 더 잘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 때문에 GS-441524 논문을 썼던 Pederson은 초기의 실험 약물로 GS-5734 대신 GS-441524를 사용했지만, 거의 동일한 약이나 다름 없다는 얘길 하기도 했죠.

실제 호주의 수의사들이 렘데시비르를 FIP에서 사용했을 때, GS-441524와 크게 다르지 않은 효과를 보였고, 렘데시비르의 경우 정맥 주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치료 초기 환자 상태가 안 좋을 때 GS-441524보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약을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알게 됐습니다. 주사제가 GS-441524에 비해서 덜 아프다는 것도 명확한 장점이었죠. 이런 얘기가 호주에서만 나온 건 아닙니다. 처음 GS-441524로 JFMS에 논문을 썼던 UC Davis의 Pederson도 렘데시비르 주사제의 효과가 GS-441524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길 했고, 영국에서도 렘데시비르가 FIP를 효과적으로 치료했다는 보고가 있었죠.

한국은?

한국은 어떨까요? COVID-19는 한국을 피해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렘데시비르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고, 유통이 됩니다. 다만 현재는 COVID-19에 감염된 사람 중에 중환자의 경우에 한해서 의료진이 국립중앙의료원에 신청을 하면, 심사 후에 약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죠. (이걸 모르고, 이 약을 구하려고 주문을 넣었다가 빠꾸 먹었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한국에서는 아직 렘데시비르를 수의사가 동물에게 처방하지는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한동안은 FIP 치료를 하고자 한다면, 여태처럼 블랙마켓을 통해 GS-441524를 구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죠.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거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COVID-19가 조금씩 잠잠해지고, 렘데시비르가 일반적인 의약품과 동일하게 취급이 되기 시작하면 동물병원에서도 보호자분께 중국에서 신뢰도를 알 수 없는 약을 직구해서 쓰시라고 하기보다는 제대로된 정식 의약품을 처방하게 되겠죠. 그 때가 되면 블랙마켓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 먼 미래라고 생각이 되진 않습니다.

미래는?

UC Davis에서는 아직 논문이 퍼블리쉬된 건 아니지만, 렘데시비르 주사제의 안전성과 효능에 대한 검증은 어느 정도 된듯 싶고, 현재는 렘데시비르 경구제가 어떤지를 평가하는 임상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렘데시비르 주사제가 널리 유통되는 것이 빠를지, 렘데시비르 경구제의 효능이 평가되는게 빠를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수의사와 보호자 모두에게 즐거운 뉴스입니다.

어떤 병이 정복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재밌는 일입니다. 발전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수의사에게는 그 페이지 위에서 무언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줍니다(실제로 약 만들고 연구하시는 분은 더 훌륭하신 분들…). 비록 누군가 열심히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놓을 뿐이긴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렘데시비르를 FIP 환자에서 쓸 수 있는 날이 한국에도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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