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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용 심전도기, 살까말까 고민 끝에 구입

진단과 치료에 필요한 모든 의료장비가 병원에 있다면 너무 좋은 일이겠지만, 어른의 이유로 늘 그렇지만은 못합니다. 병원에서 어떤 의료장비를 구비해두고자 할 때는 각자 병원의 사정에 맞춰, 해당 장비가 필요한 케이스가 병원에 얼마나 자주 오는지, 장비의 구매 비용을 합리화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진료 영역을 창출해낼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을 고려해서, 합당하다고 생각될 때 구매 결정을 내리게 되죠. (물론 그렇게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지 않는 사람들을 장비병 환자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전도기는 조금 애매한 계륵같은 장비입니다. 마취 모니터링을 할 때 쓰는 환자감시기의 심전도는 필수지만, 진단용 심전도기는 한국에서 활용도가 아주 애매하죠. 리드(Lead)가 여러개(=환자한테 달아햐하는 줄이 여러개)라서 부정맥을 “진단”하기 위해 쓰는 심전도기는 하나의 리드만 보여주는 마취 모니터링용 심전도기와는 다른 장비입니다. 진단용은 마취할 때 쓰는 환자감시기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부정맥 환자를 평가할 수 있게 해주죠.

​부정맥이 있는 환자가 많다면, 활용도가 아주 높은 장비이겠으나, 사실 한국의 동물병원 임상 환경에서 부정맥이 있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장병이 있는 환자가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 심장의 전기 신호에 문제가 생긴 환자(=부정맥 환자)들이라기보다는 심장에 구조적인 문제(판막 변성이나 심근 비후)가 생긴 환자들이기 때문이죠. 이런 환자들에선 심전도보다는 심장초음파가 더 적절한 진단 검사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살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지 않는 장비병 환자답게) 구입을 했습니다만… 이왕 샀으니, 이게 왜 계륵 같은 장비인지 한 번 자세하게 써보죠.


어떤 진단 검사가 있다면, 검사의 활용도를 2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검사 장비가 그렇듯, 병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병을 진단하고자 할 때 쓰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스크리닝 검사(=건강검진)로 활용하고자 하는 측면입니다. 먼저 스크리닝 검사로 심전도의 활용도에 대해 생각해보죠. 어떤 증상이 있거나, 이상이 의심되는 게 아닌데, 혹시 있을지 모를 병을 확인하기 위해 심전도 검사를 하는 겁니다. 혹은 마취 전 검사로 심전도를 활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고려해볼 수 있겠네요.​

예전에 검사의 민감도와 특이도에 대한 얘기를 했던 적이 있는데, 어떤 검사가 스크리닝 검사로 활용되려면 (당연하겠지만) 민감도와 특이도가 높아야 합니다. 특히 민감도가 높아야 스크리닝 검사로 사용하기 좋죠. 문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심근의 변화나 심장의 비대(=심실이나 심방의 확장)를 알려주는(=심장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지) 측면에서 심전도의 민감도는 대략 50%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병이 있는 환자에서 병이 있다고 알려주는 확률을 민감도라고 하는데, 대충 동전 던지기와 같다는 얘기죠. 민감도가 50%라면 병을 확인하기 위해 그 검사를 건강검진에서 쓰기보다는 그냥 동전을 던져서 윗면이 나오면 병이 있다고 보고, 아랫면이 나오면 병이 없다고 보는 게 더 나은 선택입니다(심전도 검사는 돈이 들지만 동전 던지는 건 돈이 들지 않으니까요).​

강아지는 심장병의 유무를 청진기로 알 수 있으니, 청진기로 심장병 유무 여부를 알기 어려운 고양이라면 활용도가 좀 나을까요?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전에 건강한 고양이에서 proBNP 검사를 통해 심장병의 유무를 확인하는 스크리닝 검사가 큰 의미가 없다는 얘길 했던적이 있는데, proBNP보다 민감도와 특이도가 더 떨어지는 심전도라면, 당연히 검사의 활용도가 더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단용 심전도는 어떤 임상 증상(실신 같은)이 있거나, 신체 검사 상에서 부정맥이 확인되는 경우에만 활용도가 생깁니다. 환자의 심장에 청진기를 댔는데, 심장이 일정한 리듬으로 뛰지 않고, 자진모리 장단으로 뛴다든가 하면 심전도를 봐야하는 거죠. 실신을 하는 경우에도 보통 실신의 가장 흔한 원인인 폐고혈압 같은 경우는 심장초음파로 진단을 하게 되니, 심전도기의 활용도는 떨어집니다만, 폐고혈압이 원인이 아니라면 다음 스텝으로는 실신의 원인이 부정맥은 아닌지 확인해봐야합니다.

의외로 가성비 최고의 의료 장비인 청진기

전체 환자군에서 심장이 자진모리 장단으로 뛰는 환자가 많다면, 심전도기의 활용도는 역시나 높아지겠습니다만, 의외로 한국의 강아지와 고양이에서는 부정맥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정맥이란 심장에서 전기 신호가 잘 전달되지 않거나, 전기 신호의 발생에 문제가 생긴 상황을 얘기하는데, 전기 신호는 보통 심장의 사이즈가 클 때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전기도 가야하는 거리가 멀면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보통 부정맥은 심장이 큰 대형견에서나 보게 되지, 심장이 작은 강아지나 고양이에서는 흔하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소형견이나 고양이라 하더라도 심장병 때문에 심장이 많이 커지면 부정맥을 볼 수 있지만,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죠.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역시나 가성비 최고의 의료 장비인 청진기로 자진모리를 확인하는 게 우선입니다)

​심장병을 관리 중인 강아지나 고양이가 있는데, 청진기로 들었을 때 심장박동이 불규칙하거나, 혹은 청진기에서 들리는 소리와 다리에서 느껴지는 맥박(pulse)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심전도를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소리는 나는데 맥박이 비는 경우). 이런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게 심전도기가 계륵인 이유지만, 청진이 우선적으로 잘 선행된다면, 상위 진단 검사의 일환으로 가치가 있는 거죠.

심전도로 부정맥이 진단된 환자에서 부정맥을 치료할 때 쓰는 약들

특정 상황에서는 필수적인 진단 검사 장비일 수 있지만, 소형견과 고양이 위주의 한국의 동물병원 임상 환경에서 심전도의 활용도는 단순히 부정맥 환자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활용도가 몹시 떨어집니다. 이게 이 장비를 계륵으로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죠. 게다가 심전도는 장비의 활용도와는 별개로 판독에 대한 공부가 별도로 필요합니다. 그림 맞추기라 쉬울 것 같지만, 의학이든 수의학이든 상당수의 의료계 종사자들이 힘들어하는 게 심전도의 판독이죠. 판독이 명확하지 않다면, 검사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활용도는 더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 심전도 검사를 해야하는가를 엄밀히 따지자면, (속된 말로) 장비값을 뽑기가 쉽지 않은 장비이지만, 심장병이 있는 환자에서 가끔 보게 되는 심방 세동(Atrial fibrillation)이나, 고칼륨혈증이 있는 환자에서 보게 되는 부정맥(Bradyarrhytmia) 같은 것들을 보고자 할 때 심전도를 대체할 수 있는 진단 검사 장비는 없습니다. 오늘동물병원의 경우, 그동안은 이런 환자에서 심전도를 보고자할 때 Alivecor 같은 모바일 심전도기를 활용했었지만, 이제는 제대로된 리드가 많은 진단용 심전도기를 쓸 수 있게 됐달까요. 이제는 그저 먼지 쌓이지 않고, (장비값은 못 뽑아도 좋으니) 활용하는 일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죠.

​한줄 요약: 살까 말까 할 때는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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